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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는 물론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등, 바울서신은 모두 후반부에 그리스도인의 실천윤리를 강조합니다. 바울서신의 특징인데, 서신서 앞부분에서 복음에 대한 설명을 집중적으로 하고, 뒷부분에서는 그 복음을 따라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복음의 실천 윤리를 강조합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서신의 윤리는 철저히 복음에 종속된 윤리입니다. 바울서신의 윤리를 넓게 말해 기독교 윤리라고 한다면, 기독교 윤리는 결국,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이 곧 그들이 복음을 이해하는 수준임을 뜻합니다. 만약 예수 믿고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복음의 전부라면, 그리스도인에게 기독교 사회 윤리나 공공 윤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은, 일단 예수를 믿으면 천국이 보장되므로, 세상에서 아무렇게 살아도 별 상관이 없게 됩니다.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남들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살고, 더 출세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지요. 기독교기업이 직원을 착취해서 이익을 내도, 탈세를 일삼거나 공정거래법을 위반해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복음에 대한 이해가 천박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담임목사직 세습을 손가락질해도, 이미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는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당당하게 “그래 우리 세습했다 어쩔래!” 큰 소리를 칩니다. 총회재판국에서도 그들의 손을 들어줍니다. 한국교회가 돈과 권력 앞에 무릎 꿇고 자정 능력을 상실한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다며 신학생들이나 일부 목회자들이 나서보지만, 교회를 이끌어 가는 교단의 어른들은 한마디로 “어리석은 놈들, 그 교회에서 스스로 결정한 것을 왜 너희들이 참견이냐?”, “합법적인 재판국이 합법적인 법해석을 따라 합법적 판결을 내렸는데, 왜 법을 따르지 않고 교회의 질서를 뒤흔드느냐?”며 오히려 나무라는 실정입니다. 기독교 복음은, 단지 개인이 죽어서 천국에 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온 세상에 흩어진 사람들을 부르셔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새롭게 창조하신 이야기입니다. 이 때 기독교 실천 윤리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새롭게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거짓을 버리고 진리를 따라야 합니다. 분을 내지 않고 즉시 화해해야 합니다. 도둑질 하지 말고 오히려 베풀고, 더러운 말을 하지 않고, 친절한 삶과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도 그 연장선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자 새롭게 창조된 새 인류로서, 세상에서 특별히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15절) 또한 오늘 말씀은 그런 분별력을 지닌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말하는데, 먼저 그들은 세월을 아낀다는 것입니다.(16절) 그러면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중국의 유학자 ‘주자’가 말한 “소년이로학난성, 일촌광음불가경”, 즉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1초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뜻인가요? 여러분,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본문의 세월은, ‘하나님의 때’로 알려진 ‘카이로스’입니다. 아끼라는 말은 조금 어려운데, ‘엑사고라조’, 구속하다라는 뜻입니다. 돈을 주고 사서 해방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세월을 아끼라는 것은 마치 노예 시장에서 노예를 사서 해방시키는 것과 같이, 악한 세상의 시간들을 우리가 사서, 하나님의 거룩한 시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시간을 하나님의 시간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수고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람이 시간을 이용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시간의 중심에는 과연 무엇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시간을 하나님의 시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는데, 실제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부활을 중심에 두고 자신의 시간을 다시 세웠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이심을 깨달았고, 그분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대를 이 세상에서 시작하셨음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활절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력이 시작된 것입니다. 교회력은 단순히 교회에서 쓰는 달력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시간을 사서 하나님의 시간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오늘이 성령강림주일 후 열세 번째 주일이라는 것은, 지금 우리의 자리가 성령강림과 주님의 재림 사이의 특정한 시간을 지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에겐 세상의 시간이 따로 있고, 하나님의 시간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모든 시간이 다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예배할 때, 기도할 때, 성경 읽을 때만이 아니라, 농사일 할 때, 집안일 할 때, 운전할 때, 운동 할 때, 심지어 잠을 잘 때도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은 어리석은 자들과 달라서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17절) 주의 뜻이란, 주님이 원하시는 것,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10절에서도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시험하라는 것은 ‘분별하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하셨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자신이 가야할 길을 분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 주님의 뜻과 무관하게,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급급할 뿐이지요. 그렇게 우리는 평소에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쪽보다, 내가 기뻐하는 쪽을 선택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내가 기뻐하는 것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 내가 기뻐하는 것을 주님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자유의지를 따라 살아갈 때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고 하실 겁니다. 그래서 바울도 유대주의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인들이 복음과 무관한 일로 사람들에게 굴레를 씌울 때, 오히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므로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딤전 4:4)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잘 분별할 수 있을까요? (18절) 분별력 상실로 말하자면 한국 교회의 오랜 비지성적 행태도 한 몫 합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주 역사 6000년 설을 주장하며 인류가 쌓아온 과학의 성과들을 통째로 부정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Good News’라고 합니다. 하지만 현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카톡에서 함께 보고, 전달하고 공유하는 뉴스들은, 많은 부분이 소위 근본주의자들의 ‘Fake News’입니다. 모든 사회 이슈에 대해 ‘진리’로 가장한 거짓을 가르치며 퍼 나르며, 그들만의 게토를 만들고 있습니다. 술, 그것도 아주 악독한 술에 취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술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이 충만하고 가득할 때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이 아닌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19~20절) 그러나 타락한 시대에는 예배마저도 쇼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기에, 우리는 늘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지금 나는 과연 진정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 - 지난주일 설교 중에서 (에베소서 5장 15~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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