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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탄생한 ‘부활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사도들은 뿔뿔이 흩어져 예전의 생활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흩어진 제자들을 다시 모으시고, 40일 동안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약 120명 가량의 제자 공동체가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먼저 가룟 유다로 인해 생긴 12사도의 빈자리를 채울 사람을 선출했습니다. 그 때 사도를 선출하는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할 자’였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부활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33절). 얼마 후 이 최초의 교회공동체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경험합니다. 그 때 성령의 임재로 방언이 터졌습니다. 그 날의 방언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해 객관적으로 그 뜻을 파악할 수 없는 오늘날 대부분의 방언과는 달리, 실제로 당시 통용되던 세계 각국의 언어였습니다. 오순절 방언 사건은 바벨탑 사건 이후 수많은 언어와 민족으로 나뉜 세상이, 이제 성령 안에서 하나로 통합되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것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이는 종말의 도래를 말합니다. 베드로는 이를 가리켜 선지자 요엘이 예언한 종말이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성서가 말하는 종말은 온 우주가 폭발하여 모든 게 다 끝나버리는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새로운 시작, 곧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함께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베드로는 그날에 예루살렘 사람들을 향해 선포했던 자신의 첫 번째 설교를 이렇게 끝맺었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이 패역한 세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받으라!” (행 2:36,40)
그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의 수가 삼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 날을 시작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에 폭발적으로 전파되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는 수많은 하나님 나라의 표적과 기사가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주목하게 되었고, 사도들은 몰려오는 사람들에게 만물을 회복하시기로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증언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유대 당국)은 사도들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준비하기에 앞서 먼저 사도들을 붙잡아 심문했습니다. 사도들이 증언한 내용과, 당시에 일어난 기적적인 사건들, 또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까지 면밀히 조사했습니다. 그들은 고민 끝에 최종적인 판단은 내리지 않고 대신 사도들을 협박하여, 다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지 못하도록 엄중히 경고한 후에 풀어주었습니다. 그 무렵 예루살렘 교회 신도들이 기도했던 내용이 행 4:23~3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 중에서 29~31절입니다.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여러분, 예루살렘 교회는 이처럼 성령 충만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그런 예루살렘 교회에 걷지 못하는 자가 걷고, 질병이 치유되고. 귀신이 쫓겨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 나라라는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표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이 외에 또 다른 표적 한 가지를 더 소개합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 신도들이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공동의 소유로 하고, 어느 누구도 자신의 재물에 대해, 그것의 일부라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았던’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마음과 한 뜻’이란 ‘하나의 심장과 하나의 영혼’, 즉 완전한 한 몸을 말합니다. 이것을 오늘날의 현실적인 단어로 말하면 ‘하나의 통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부부조차 하나의 통장을 사용하기보다 각자의 통장을 사용하는데, 하물며 교회의 많은 신도들이 한 통장을 사용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는 그런 개인의 이기심이 완전히 사라진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이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놀라운 표적’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표적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표적은 그 자체보다, 그것이 가리키는 바가 더 중요합니다. 이를테면 걷지 못하는 자가 걷게 되는 것은 놀라운 기적이고, 그런 기적은 당사자와 가족에게 말할 수 없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조차, 그 어떤 질병이든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치유 받은 사람은 지극히 일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적극적인 치료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 역시 하나의 표적인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은 오늘날의 교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무엇보다 교회 안에서 신도들 간에 서로의 형편을 살펴주고, 어려움에 처해있는 이들을 돌아보고, 위로와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고린도교회 에베소교회 등 이방의 여러 교회로부터 헌금을 모아서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놀라운 일을 시작했던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 교회들의 도움을 받게 된 것이지요. 또한 모든 교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당파를 만들어 서로 다투는 행위를 멈추어야 합니다. 교회가 한 마음과 한 뜻을 품지는 못할망정, 사분오열 갈라져 싸워서야 되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 교단을 비롯해 많은 교단 교회들이 교회 안팎으로 각종 소송을 벌이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표적을 일상화하겠다는 헛된 꿈을 꿀 것이 아니라, 교회 자체부터 구습과 적폐를 청산하고, 보다 정의로운 공동체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서로 배려하고 돌아보며, 작은 일에서부터 한 마음과 한 뜻을 이뤄나가는, 지극히 작은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라도 실천해나가는 그런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 지난주일 설교 중에서 (사도행전 4:32~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