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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모두 같다 (로마 3:9~26) - 로마서 묵상 11 유대인은 하나님에게서 율법을 위임받았습니다. 그것은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불의를 저지른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자, 그러니 유대인은 이방인보다 못한 존재인가요? (이런 논리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했다.) 이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바울은 대답합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같다는 것입니다. 9절 : 질문의 요점은 누가 더 나으냐 또는 못하느냐에 있지 않고, 서로 다를 게 있느냐에 있습니다. 대답은 ‘없다’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나을 것도 없이 “죄 아래 있다”는 점에서 모두 같다는 것입니다. 말은 쉽지만, 상황을 생각하면 담대하기 짝이 없는 발언입니다. 양쪽에서 비난받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고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나 ‘불교인’이나 모두 같다는 말 앞에 짐짓 서보면, 당시 바울의 선언이 얼마나 대담한 것이었는지 대충 짐작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말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계산해보고 거기에 따라서 말을 바꾼다면, 그런 사람은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들 앞에 설 자격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살아야 합니다. 10~18절 : 사람은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이 사람입니다. 옹기장이와 옹기가 흙에서 서로 만나지만 그릇은 그릇이고 사람은 사람이듯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리 깨끗한 사람이라도 흠 있는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의 불의를 묘사하기 위한 인용이 다소 과장된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잘못된 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검댕이 전신에 묻었든 손바닥에만 묻었든 몸이 더럽혀진 점에서는 똑같지 않습니까. 따라서 의로운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19~20절 : 대한민국 영토 안에서는 대한민국 법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누구도 모세의 율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비록 유대인들에게 위임되기는 했지만 온 세상 사람이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그 법에 이의(異議)를 붙일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을 면제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 유죄 판결을 받는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드러난 행위만 보고 심판한다면 무죄 판결을 받을 사람이 없잖아 있겠지만, 감추어져 있는 속마음까지 심판할 때에는 아무도 그 법망(法網)을 피할 수 없습니다. 율법이 사람을 의인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아무도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법은 왜 필요할까요? 무엇이 범죄인지 알게 하려고 있는 것입니다. 법의 기능은 범죄를 없애는 데 있지 않고(그것은 불가능하다.), 범죄를 범죄로 알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율법의 역할이자 한계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율법의 한계를 넘어서는 예수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21~22절 : ‘율법과 선지자들’은 (구약)성경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 곧 ‘예수’십니다. 그분은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거를 받으셨으나 율법 바깥에 있는 분입니다.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분은 인간의 의나 불의에 영향을 받지 않는 하나님의 의를 당신 몸으로 완벽하게 체현(體現)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삶과 죽음이 곧 ‘하나님의 의’였습니다. 그러하기에 만일 누가 참으로 그분을 믿는다면, 그도 하나님의 의를 알게 되고 하나가 될 것입니다. 23~24절 : 아담의 범죄는 그가 인간이었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손발이 없는 나무는 온몸으로 비를 맞지만 사람은 우산을 만들어 비를 막습니다. 인간의 유능(有能)함이 하늘의 영광에 이르는 길을 스스로 막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이란 예수께서 이루신 속량을 뜻합니다. 보상금을 주고 노예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이 속량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속전(贖錢)으로 지불하시어, 죄의 노예가 된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노예가 자신을 속량하지는 못합니다. 노예가 아닌 누군가가 값을 지불해야 하는데, 그럴 때 그것은 ‘값없이 주고받는 은혜’입니다. 25~26절 :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의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여기에 인간은 ‘믿음’을 통하여 참여할 수 있을 뿐입니다. 참여하는 자는 의인으로 인정받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구원’이라 합니다. 그러니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이루는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