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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 12:14~21) - 로마서 묵상 36 바울이 ‘로마서’를 쓸 무렵에 이미 본격적으로 기독교 박해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환란 중에 참으라(12:13)는 바울의 권면은 결코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그 말은 온갖 고초와 박해를 겪은 사람이 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로마서를 비롯한 바울의 편지는 생각으로 거둔 열매이기 전에 경험의 열매입니다. 바울의 서신들을 읽을 때는 이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14절 : 예수님의 가르침(“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5:44)을 그대로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에, 박해받기를 스스로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박해를 받지 않고서 성숙하고 성장한 종교는 없습니다. 박해는 괴롭고 아픈 것이지만 성숙해지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입에 쓴 약’입니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 지금 고통을 주고 있는 저 박해자는 내 인격의(신앙의) 성숙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한번 해보는 소리가 아닙니다. 엄연한 사실이요 진실입니다. 이 진실을 깨달으면 박해자를 저주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를 위해 복을 빌고 기도할 따름입니다. 예수님도 당신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무리를 위해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물론, 나를 박해하고 있는 자들의 생각과 행위를 정당하게 여기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들은 분명히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 몰라서 그렇다고 하지만, 무지(無知)도 죄악입니다. 죄악 가운데서도 큰 죄악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참으로 역설적이지요. 박해자는 지금 자신의 무지와 범죄로 내가 성숙해지도록 돕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초대교회가 로마의 카타콤(지하 묘지)에 숨어 예배하다가 잡혀서 순교를 당하는 박해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기독교는 없었을 것입니다. 빌라도가 오판(誤判)을 저지르지 않고, 가야바가 과오(過誤)를 범하지 않았다면, 또한 그들의 부추김에 놀아난 대중의 어리석음이 없었다면 예수님인들 어떻게 십자가에 달리셨겠습니까. 그랬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하여 아무 아는 바가 없을 것이고, 이 땅에는 기독교라는 종교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그들의 공(功)을 인정하자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들의 과오(過誤)가 우리의 성장과 성숙에 도움이 되었다는(되고 있다는) 역설을 깨닫고,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자는 얘기입니다. 그들이 비록 우리에게 잘못을 저질렀지만, 우리는 그들을 저주할 수 없습니다. 남들이 어떻게 하든, 착한 사람은 오직 착한 행실을 보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박해자들을 위하여 복을 빌어주는 까닭은, 그들이 우리를 돕는다는 진실에 눈을 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우리 자신이 남에게 저주는 할 수 없고 다만 복을 빌어줄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 “착하게 구는 사람을 나는 착하게 대한다. 착하지 않게 구는 사람을 나는 역시 착하게 대한다. 덕(德)이란 착한 것이다.”(노자,49장) 15절 : 삶의 중심을 머리가 아닌 가슴에 두면, 우는 자와 함께, 비록 내게는 울어야 할 이유가 없더라도 울 수 있으며,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비록 나에게는 즐거울 일이 없다 해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요한11:35)처럼, 그런 사람을 우리는 가슴이 살아있는 사람이라 부를 수 있고, 가슴이 살아있는 사람이야말로 ‘참사람’입니다. 그의 가슴 속에 사랑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 “윗자리에 있으면서 너그럽지 않고, 예의를 갖추는데 공경스럽지 않고, 초상을 당하였는데 슬퍼하지 않는다면, 나는 무엇을 갖고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겠는가?” 16절 :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하는 일은 두 사람이 함께(동시에) 노력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분업을 말하는 게 아님) 둘 가운데 누군가 먼저 자기 마음을 비워 상대의 마음으로 자기의 마음을 삼아야 합니다. 옛말에, ‘성인(聖人)은 자기 마음을 따로 지니지 않고, 백성의 마음으로 자기 마음을 삼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도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동시에) 노력해서 이룬 게 아닙니다. - 천주교 : 50%+50% / 장로교 : 100%+0% / 감리교 : 100%+100% - 하지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먼저’(이 순서를 뒤집으면 안 된다)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물론 한 쪽의 노력만으로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시작은 어느 한쪽이 ‘먼저’ 해야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저절로 높은 데 마음을 두지 않게 됩니다. 높은 데 마음을 둔다는 것은, 출세하여 높은 데 앉으려고 욕심을 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스스로 ‘지도자’의 자리에 앉으려고 ‘출마’(出馬)를 한다는 것은 소가 웃을 일입니다. 스스로 지혜로운 척하는 자보다 더 어리석은 인간이 세상에 있을까요? 17~18절 : 악으로 악을 갚는 것은, 악한 것에 동조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가리면 그것은 참된 선행이 아닙니다. 태양이 밤낮없이 태양이듯이, 선은 언제나 누구한테나 선일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는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할 수 있거든”이라는 단서가 필요합니다. 사람과 평화를 이루는 일은 억지로 할 수도 없고 또 억지로 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19~21절 : 만일 ‘원수’가 있거든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원수’라고 부를 존재가 사라지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면, 더 이상 원수는 없습니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에는 원수를 먹이고 마시게 하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 숯불을 머리에 쌓아놓는다는 말은, 그렇게 해서 상대의 머리를 태워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그를 부끄럽게 한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 마지막 절, 악과 맞붙어 싸워서 이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선은 그 무엇하고도 싸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善)입니다. 선은 다만 자기를 지킬 따름입니다. 아무하고도 싸우지 않으니, 누구도 그를 이기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선으로 악을 이긴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