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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신비로운 기적이나 그저 사람들끼리의 나눔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과연 이 땅에서 어떻게 시작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걸 이루어내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를 알게 해주는 사건입니다. 역사를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당시 사람들의 처지와 형편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나눔의 공동체이고 나눔은 그것 자체로 매우 좋은 것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아니면 호기심이 들어 예수라는 사람을 그저 보기 위해) 들판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현실이란 정말이지 처참할 지경이었습니다. 나눌만한 음식이요? 그런 건 아예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 종일 굶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절박한 현실이 그들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복음서 전체의 증언을 놓고 보면, 이 시점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말로만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대체 무엇인지 실제로 보여주어야 할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마태복음에 의하면, 제자들은 ‘① 여기는 빈들이다. ②날도 이미 저물었다. ③무리를 흩어서 각자 알아서 먹게 하자.’고 합니다. 해결할 수 없으니까, 스스로 알아서 먹으면 다행이고 그렇지 못하면 어쩔 수 없다는 말이지요. 200데나리온이요? 그만한 돈이 있으면 되겠다고 계산해서 한 말이 아니라, 이것은 해결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보고 해결하라고 하시는데, 제자들은 해결할 수 없는 이유만 늘어놓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들이 처한 ‘위기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요? 먹을 게 없어서요? 아닙니다. 먹을 게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걸 해결할 능력이 있으면 위기는 단지 풀어야 할 문제일 뿐 위기 그 자체는 아닐 것입니다. 그럼 먹을 게 없는 현실적인 문제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다 흩어지게 생겼으니, 요즘 말로 하면 목회 실패, 즉 예수님 사역의 위기라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것도 여전히 위기의 본질은 아닙니다. 이 모든 문제의 본질적인 위기는 바로 제자들이 전혀 능력이 없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현실적인 문제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자 그걸 해결해 보려고 현실적인 생각과 조건에 갇혀버린 것입니다. 이러저러하니 못한다. 이게 제자들의 답입니다. 어쩐지 우리의 신앙생활과 놀랍게도 닮았지요? 여러분, 믿음이란, 이런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방법을 뚫고 나가는 능력입니다.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 이런 능력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게 진짜 위기의 본질이라는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해결하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런 생각의 변화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때 한 아이가 가져온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생선’은 이 위기를 돌파하는 계기가 됩니다. 하지만 이 오병이어는, 이들이 처한 현실에 견주어 보면 절망스러운 자산입니다. 그러니까 이 오병이어는 희망의 근거가 되는 게 아니라, 낙심하는 이유가 되는 겁니다.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에 모두가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셨을까요? 무리를 불쌍히 여긴 예수님은 먼저 사람들을 그곳에 앉히셨습니다. 먹을 게 없어 뿔뿔이 흩어질 뻔했던 사람들을 한데 모으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감사의 기도를 올리셨지요. 여러분,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이라도, 그것으로 시작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조건이 다 갖춰져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작은 시작도 감사하며 그로인해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하게 채워지도록 간구하는 자세가, 곧 놀라운 일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것은 메시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고, 이 사건을 통해 복음서 기자들은 한 결 같이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이심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방법에 눈을 뜨는 일입니다. 모든 악조건 속에, 인간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알아서 문제를 해결하도록 내버려두는 방식이 아니라,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것을 소중히 여겨 함께 나누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을 예수님은 보여주려 하신 것입니다. 이 오병이어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충분한 양식이 될 수 없다고 여겨지지만, 그것은 남자 어른만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는 첫 출발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처절한 양식이 아니라, 희망의 식사, 그 첫 출발이 되었습니다. ▣ - 지난주일 설교 중에서 (요한복음 6장 1~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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